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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교양, 정치, 철학, 악의 평범성

인간의 활동의 다양성 - 노동

인간의 활동의 다양성 - 노동

인간의 활동의 다양성 - 노동
인간의 활동의 다양성 - 노동

'정치 없이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가?' 이미 질문에서 답을 느끼시겠지만, 정치가 없으면 그냥 삶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이 불가능하다는 주제를 던지는 것인데요. 과연 어떤 점에서 이 부분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지 그 부분을 한나 아렌트의 핵심적인 주 저술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958년도에 한나 아렌트가 쓴 책 한 권이 있는데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아주 유명한 작업을 한나 아렌트가 한 가지 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고 있는 활동을 정치라는 관점으로 봤을 때 세 개의 구분을 해낼 수 있겠다는 인간의 활동에 대한 세 가지 구분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노동 행위고요. 두 번째는 작업 행위입니다. 세 번째는 행위인데요. 첫 번째 활동 노동은 영어로는 labor. '노동운동' 이런 표현을 쓰는 그 labor입니다. 두 번째, 작업이라는 말은 영어 단어로 work, 그러니까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요. 이 일이라고 하는 것과 노동이 별로 다를 것 같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 구분을 해보게 됩니다. 세 번째, 인간의 활동으로 행위, action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이고 좀 더 다른 성격의 것이 개입되는 활동으로 설명하는데, 정치 활동이 바로 행위라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구분하는 원리가 다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서로 혼동하게 되면, 그 혼동의 결과가 심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아렌트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다 묶어서 예를 들어서 노동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다 설명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런 식의 단일한 관점으로 접근하게 되면, 또한 '정치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문제 또 구체적인 인간 행위의 처방 문제에 있어서 왜곡된 결과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나 아렌트를 따라서 인간의 활동을 이 셋으로 구분하는 그 구분에 대해서 깊이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활동 - 노동

그 첫 번째는 노동인데요. 이 노동은 우리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고 먹어야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죠. 생존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육체적인 존재라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에서 노동이 필요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의 생물학적 유지를 위해서 이루어지는 활동이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음식을 먹고 또 신진대사를 하고 또 배설도 하고요. 그런데 이것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우리 신체기관의 활동과 서로 상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필요를 공급하는 인간의 활동이니까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죠.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에 얘기하는 필연성이 있고요. 또 배고프면 견딜 수가 없죠.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이 노동과 관련된 부분은 그 긴급성에 있어서 강도가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몸의 필요와 그에 따른 필연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이 노동의 영역인데요. 이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몸의 유지를 위해서는 욕구의 충족이 필요하죠. 배고픈 거, 목이 마르는 거. 이런 욕구로 표현되는 것을 충족시켜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욕구 충족이 필요하다는 이 '필요'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바꾸면,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 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또 필연적인 활동이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금방 표현했던 몇 개가 단어가 있죠? 필요라는 단어도 썼고, 필수라는 말도 썼고, 필연성이라는 말도 썼습니다. 우리가 이걸 영어로 표현해 보면, '필요'는 need라는 말 또 '필수적'이라는 말은 necessary라는 형용사를 쓸 수 있죠. '필연성'이라는 necessary의 명사형인 necessity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우리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생필품'이라는 말의 영어 단어는 necessity, '필연성'이라는 단어가 추상명사인데 이걸 복수형으로 만들면, 다시 말해서 necessities라고 하면 이게 보통명사가 되어서 '생필품'이라는 단어가 됩니다. 제가 굳이 이 영어 단어를 끄집어낸 이유를 아시겠죠. 다시 말하면, '필요', '필수', '필연', '생필품' 이것은 전부 need와 연관된 '꼭 필요하다'라는 이 단어로 다 연결해낸 그런 단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노동은 바로 이와 같은 필수적인 활동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생명의 필연성과 연관이 되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가장 긴급하고 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그런 인간의 활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이 노동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노동은 인간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행동이다. '라고 말을 했을 때 그럼 이 노동을 통해서 무언가 물건을 만들죠. 그리고 그 물건은 우리가 먹고 섭취함으로써 소비를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노동의 산물은 소비의 대상입니다. consumption, 소비하는 사람은 consumer라고 얘기하는데요. 이 소비는 소비를 하게 되면 소멸해버리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래서 음식물과 같이 이 소비재는 음식을 잘 만들어도 그것을 소비해서 먹어버리게 되면, 그 음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죠.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또는 하루 식사를 하고 다음에 식사를 하고 이런 음식물을 먹는다는 것이 주기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런 필요들이 발생되는데요. 음식물은 한 번 딱 만들어서 그대로 주야장천 몇 달, 몇 년 이렇게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죠. 물론 요즘은 가공을 잘해서 빵도 오래 있을 수 있고 과자는 훨씬 더 오래 있을 수 있지만, 원래 노동의 산물로 만들어진 직접적인 소비의 대상물은 그 수명이 굉장히 짧습니다. 그러니까 이 음식물을 만드는 활동도 소비의 주기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짧은 소비 기간만 갖게 되고요. 그래서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 이례적으로 하고 영구히 쉬거나 장기적인 어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끼니때마다 반복해야 되는 반복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 노동의 과정은 순환성을 갖습니다.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자고 또 일어나서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자고. 쳇바퀴 돌듯이 순환되고 반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만들고 소비하고, 만들고 소비합니다. 또 우리 신체적으로 보면, 먹고 싸고, 먹고 싸는 이런 관계. 또 먹으면 이제 그 영양분이 우리의 몸을 돌고 돌죠. 그래서 이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순환성, 반복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동 대상물, 우리가 밥을 먹으려면 쌀을 가지고 밥을 지어야 되는데요. 이 밥은 쌀로 나오니까 쌀을 만들려면 벼농사를 지어야 되잖아요. 또는 우리가 과일을 먹거나 식용으로 고기를 먹을 때 가축을 활용을 하게 되고요. 그런데 이런 노동의 대상물도 마찬가지로 주기적인 반복의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1년 주기로 우리는 쌀농사를 짓죠. 그리고 과일도 매년 수확을 하죠. 그리고 가축도 키워서 잡아먹고 또 키우고 키우는 이런 순환성, 반복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탄생과 소멸의 반복 속에서, 우리가 태어나서 죽는 이 과정 속에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과정은 원운동과 같은 계속적인 반복을 하게 되는 겁니다.

노동과 권태기

이러한 반복이 진행되다 보면, 사람이 지겨워지죠. 권태가 생깁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가 노동을 하게 되면 노동 때문에 기쁨이 있고 또 그 성취감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것이 반복되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권태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썼던 책 가운데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어떤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 "아무리 뛰어나고 영리한 여성도 결혼해서 가사노동에 메어 3년만 지나고 나면, 머리가 굳어지고 아주 둔하게 될 수밖에 없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 결혼을 해서 가사에 들어오게 되면, 이제 남편을 위해서 또는 가족을 위해서 즐겁게 가사노동을 하지만, 이 가사노동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의 반복이죠. 이 반복되는 노동 속에 3년 만 똑같이 쳇바퀴 돌듯 살고 나면, 아무리 뛰어난 머리도 둔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노동의 질곡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늘 반복되는 그리고 똑같은 형태의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나중에는 지겨워지고 힘들어지는데,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러한 노동을 끝내거나 최종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아마 죽는 날까지 이것은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지속이 힘드니까 돈을 이용해서 이 부분을 해결하려고 하죠.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서 이 일들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동은 거의 노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노동은 노동의 대상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집니다. 거기에는 이런 고통도 따르지만, 또 노동에는 흥미로운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노동을 할 때 밥을 짓는 노동은 반복적이지만 예를 들어 농사를 짓거나 또는 밖에 나가서 일을 해서 먹거리를 계속 생산하는 이 활동을 하려면, 우리가 논에서 벼를 키우는 과정이 그냥 쌀만 뿌리면 저절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잖아요. 잘 가꾸어야 되고, 잡초도 뽑아야 되고,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퍼서 부어야 되고요. 이런 아주 고통스러운 노동을 요구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산물을 줄 때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동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으로 뛰어들어서 자연의 저항에 대항해서 노동의 산물을 우리가 가져와야 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그 노동의 과정 속에서 또 자연물이 갖고 있는 이 자연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우리가 노동을 통해서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아주 독특한 측면. 물론 지나친 노동은 우리의 심신을 파괴시킬 수 있지만, 적절한 노동은 우리의 삶에 활력을 줄 수 있고요. 또 노예의 노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때 갖게 되는 생명력을 우리가 몸에 지닐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을 아주 정확하게 포착했던 사람이 헤겔이라고 하는 독일 철학자이고, 그의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에서는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노예의 노동을 통해서 어떻게 뒤집어지는 관계를 맺는가? 다시 말하면, 주인과 노예 관계의 전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있습니다. 주인은 노예의 노동의 산물만을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노예는 자연에 대항해서 끊임없이 일을 하는 가운데 그의 생명력을 축적하게 되고, 그가 만들어낸 생명력에 주인이 의존하게 되면 이 지속적인 의존관계가 결국은 주인을 노예처럼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노예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진정한 생명력의 주인이 되는 그런 관계가 되고 이 부분에 역전이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의 경험이 고대 노예제 사회의 붕괴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으로 제시를 하게 됩니다. 노동은 이와 같이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노동은 인간에게 아주 필수적으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고, 그 속에서는 질곡도 있고 생명력을 부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이 노동과 관련된 여러 측면을 얘기했는데요. 노동과 관련해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될 점은 노동은 인간의 생물학적 필요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따라서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강제의 요소가 개입이 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