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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교양, 정치, 철학, 악의 평범성

정치행위의 특징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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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행위, action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말을 하다 보면 '활동', '행위' 이 두 개념을 자꾸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있는데요. 정치 행위를 얘기할 때는 action, '행위'라고 얘기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고요. 폭넓게 인간이 하고 있는 여러 가지 노동과 작업을 포괄적으로 부르는 이름은 '활동'이라고 하겠습니다. 한쪽은 behavior가 되고 여기는 action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행위는 특히 정치적 활동으로서의 행위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분이 들으셨다시피 정치 행위의 핵심은 말로 하는 행위입니다. 말없이 이루어지는 행위는 결국 말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그 의미가 설명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말 없는 행위는 말이라는 행위의 종속적인 역할과 기능을 갖습니다. 말이 훨씬 더 우선이라는 것이죠. 우선 이 행위라는 것에 자세히 들어가기 전에 서양에서 크게 인간의 활동을 나눠서 얘기했던 몇 가지 개념들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한쪽은 활동적 삶이라고 부르는 그룹이 있고, 또 다른 쪽은 관조적 삶이라고 부르는 그룹입니다. 영어 단어를 쓰는 것도 조금 더 유식하게 보이는 방법이긴 한데, 라틴어 단어까지 쓰면 훨씬 더 유식하게 보이겠죠. 그래서 라틴어 단어를 한번 써보겠는데, '활동적 삶'은 vita activa. 그런데 vita는 '삶, 생명, 생활' 이런 단어고요. activa 이거는 발음을 그렇게 해서 그렇지 영어의 action 하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activity, action, 다시 말하면 활동하는 삶, vita activa라고 보았던 인간 삶의 그룹 부분이 있고요. 또 관조적 삶은 vita contemplativa. 여기에서 vita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삶'이고요. contemplativa는 영어 단어의 contemplation. 이 말은 '관조'라는 말입니다. 조용히 사태를 직관하기 위해서 보고 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기다리는 활동. 이것을 우리가 관조라고 부르죠. 관조해서 명상을 하거나 또는 생각을 통해서 뭔가 떠올리기 위해서 조용히 지켜보는 것. 이런 관조적 삶을 크게 둘로 나눕니다. 활동적 삶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금방 말씀드린 것처럼 노동, 작업, 행위. 이 세 가지가 활동적 삶에 들어갑니다. 관조적 삶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자의 삶입니다. 철학의 본래적인 것은 지혜와 진리를 통찰하는 것이죠. 그래서 철학자들은 곰곰이 생각을 합니다. 말을 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리고 깊은 생각, 진리에 대한 관조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죠. 또는 종교인들. 하나님의 말씀, 신의 뜻을 헤아리려고 하는 자세. 또는 인문학자들이 하는 태도, 삶 이런 모습들이 전부 관조적 삶에 해당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을 나누었을 때 이 두 가지의 삶은 어느 쪽이 좀 더 가치 있는 삶일까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 비교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는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다고 하는 표현에 대해서는 상당히 거부감이 있습니다. '다 가치가 있겠지. ' 그렇게 생각을 하죠. 맞습니다. 전적으로 공감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 전통적으로는 거기에 차별화를 했습니다. 차별의 기준은 뭐냐 하면, 어느 쪽이 훨씬 더 자족적이고 스스로 충실한 삶을 사느냐. 다시 말해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 성격을 갖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관조적인 삶은 훨씬 더 자립적인 것이고, 활동적인 삶은 대단히 자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관조적인 삶이 활동적인 삶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아마 많이 들으셨을 거예요. 이 이야기는 피타고라스라고 하는 철학자 또는 수학자가 가장 처음에 했던 이야기로 알려져 있는데요. 고대 올림픽 게임을 예로 들면서 거기에 세 그룹의 사람을 얘기합니다. 첫 번째 그룹은 실제로 올림픽 게임에서 1등을 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분투하고 노력하는 사람. 이것은 정치가의 삶으로 표상이 될 수 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게임을 바라보고 구경하면서 게임을 즐기는 사람 있죠? 이 사람은 관조자의 삶이고 철학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활동적으로 경기에 참여해 있는 사람은 참여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뛰는 그 경기에만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경하는 사람은 올림픽 게임 전체를 보고 있고 진행되는 과정이라든가 모든 것을 다 충분히 볼 수가 있죠. 그래서 전체를 조망하고 있기 때문에 이 경기자의 삶보다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구경꾼의 삶이 훨씬 더 자기 충족적이고 폭넓고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관조적 삶은 바로 철학자의 삶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그룹의 사람이 있죠? 이 경기장에 나와서 물건 파는 삶입니다. 돈을 벌려고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게임에도 관심이 없고, 구경하는 데도 관심이 없고, 뛰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이익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죠. 그러면 이 세 부류 가운데 이들은 가장 저급하다는 평가를 피타고라스가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동하는 삶 그리고 경제적인 삶 그리고 정치가의 삶, 철학자의 삶. 이 셋 가운데 가장 탁월하고 가치 있는 삶은 철학자의 삶이고 그다음이 정치가의 삶이고 그다음이 경제에 종사하는 삶이다. 옛날에는 다 동의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아마 여기에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왜 옛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까를 살펴보면,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바로 철학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재미있자고 하는 얘기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활동을 분석해서 노동과 작업, 행위 이야기를 하고 그 중요성을 들여다보았을 때는 사실 어떤 취지가 있느냐 하면, 서양의 전통 속에서 철학적 삶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그다음으로 정치가 그리고 인간의 활동과 중심이 되는 그런 활동적 삶을 좀 더 낮게 보았던 소위 위계질서의 의식이 과거에 분명히 서양 전통에 있었는데, 이것이 어느 순간에 뒤집어지는 역사가 있었고요. 그래서 그 뒤집어지는 역사 그리고 정치라고 하는 것의 핵심을 보았을 때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정치에 대한 관점에 따라서 정치가에 대해서 보내는 찬사와 경멸 이런 것들이 과연 어떤 것이 올바른 평가가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올바른 위계질서에 있어서 정치가에 대한 자리매김이 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주는 그런 시도를 아렌트가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틀, 다시 말하면, 전통적으로 관조적인 삶을 높이 보았던 것들을 전복시켜서 인간의 활동적 삶이 의미가 있고 탁월성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 그리고 그 안에서도 노동과 작업, 행위 각각 삶의 유형이 다르다는 것은 우리가 아렌트를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요. 그러면 도대체 이 행위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고 그게 왜 필요할까? 이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행위라는 것의 의미와 필요성

이 행위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행위라고 하는 것은 삶의 필요, 생존을 위한 필연성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실존적인 욕구, 다시 말해서 실존이라고 하면 인간이 다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 나의 삶은 다르다. 그리고 개개인의 삶은 다 가치가 있고 각각의 삶에 충실성을 요구하는 그런 관점. 이것을 우리가 실존적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다르고요. 어느 누구도 그가 부자건 가난하건 또는 노동자건 재벌이건, 어떤 누구 건 상관없이 그 사람은 사람이라고 하는 단지 그 조건에서 모든 개인은 그 삶의 중요성을 다 가지고 있다는 점. 바로 이것 때문에 인간에게는 그 개인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행위로 행위가 소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은 그저 하나의 인류라고 하는 종(種)의 일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갖고 있고, 자기의 얼굴을 소중히 여기고, 나만의 삶을 가꾸어가려고 하는 그런 존재. 이런 존재가 혼자 따로 떨어져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삶 속에서 함께 자신의 삶을 영위하려고 한다는 점. 바로 이 부분에 정치가 필요한, 인간에게 있어서 정치적 행위가 나타나는 지점이라는 것입니다. '정치적'이라는 말은 떼고 그냥 '행위'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이런 모습을 나타내고 드러내고 그런 모습의 인간들이 함께 살려고 하는 노력으로 나오는 활동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개념 하나가 떠오르게 되실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복수성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르다. '라고 하는 이 단순한 차이. 그리고 사람은 다 똑같이 생겼지만 동일한 사물을 보더라도 다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앉아있는 자리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저를 조금씩은 다른 각도에서 볼 수밖에 없다는 것. 가장 왼쪽에 있는 사람은 저의 왼쪽 부분을 중심으로 보겠죠.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저의 오른쪽을 중심으로 해서 저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원근으로 펼쳐져서 앉아있는 모든 학생들은 저의 조금씩,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어떤 인간도 같은 곳에 시각을 완전히 겹쳐서 서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사물도 다른 각도에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주 사실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그 스스로가 개성에 차이가 있다는 것 외에도 그들에게 입력이 되는 어떤 사태에 대한, 사실에 대한 인식조차도 이처럼 다양하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다르다는 것, 차이라는 것은 또 흥미롭게도 드러낼 것을 요구합니다. 누군가가 얘기를 하는데 나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다른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자연스럽게 모습입니다. 행위는 바로 이처럼 서로 다른 생각, 이해를 나타내고 표현하면서 그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관계, 일들. 이것이 바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처럼 인간이 다 다르긴 하지만, 인간들 사이에는 여전히 공통적인 요소가 존재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앉아있는 곳에서 그들 가운데 공통적인 관심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죠. 학생들 50여 명이 다 다르게 저의 말을 듣고 또 저의 모습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 자리에 와 있는 이유는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름의 요소와 공통의 요소, 이 두 가지가 함께 가고 있는 이 장이 바로 우리들의 공동체적인 삶의 자리고요. 경제의 영역은 다릅니다. 경제는 오직 경제적인 결과라는 하나의 공통적인 요소가 있고 차이와 다름의 요소가 최소화되는 영역인 반면에 정치의 영역에 있어서는 공통의 요소도 최대화되어 있고, 다름의 요소도 최대화되어 있는 바로 그와 같은 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통의 일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개성과 차이가 존중되고, 다양한 의견이 개입되고 논의되는 일. 바로 이것이 행위라는 방식으로 하게 되는 인간의 활동인 것입니다.

인간이 행위를 하는 이유

이런 인간의 행위는 왜 하는 것일까요? 고대 로마 사람들은 흥미로운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죠. 그래서 가멸적 존재, mortal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 멸적이고 유한한 인간이지만, 인간에게는 또한 영혼에 대한 또는 불멸에 대한 욕구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공동의 삶 속에서 정치적인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서 기억이 됨으로써 그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 불멸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 부분이 고대 로마인들이 정치를 소중하게 여겼던 까닭입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런 정치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를 위해서 개인이 헌신을 하고, 그래서 그 공동체가 헌신한 개인을 지속적으로 기억해줌으로써 필멸의 인간, 가 멸적인 인간이 신적인 불멸성을 획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치가 인간에게 해주는 긍정적인 기여라고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서 조각을 만들고 인간을 신처럼 대접하는 모습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로마인들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될 점은 정치를 통해서 그들이 불멸에 이르게 되는 무엇인가 있다면, 바로 그와 같은 불멸적 요소가 정치적 행위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 위대함을 구성하는 내용이 바로 우리 공동체에게 유익하고 기억할 만한 요소로 가치를 가진다는 그 점에 주목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치에는 수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고 수많은 행동이 나올 수 있는데, 그 행동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치에게 '어떤 특정한 답이 있느냐?'라고 요구를 하면, 답은 없을 수 있겠죠. 그러나 분명히 모든 정치 행위가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A라는 정치가가 하는 일, B라는 정치가가 하는 일, 그냥 이것과 저것이 차이가 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 속에는 좀 더 가치 있는 것, 좀 더 의미 있는 것, 무언가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탁월성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탁월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이것은 개인적인 차이와 공통의 그 무엇이 함께 결합되는 그 장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미 있는 단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선 시간에 잠깐 말씀을 드렸는데요. 우리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가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즉, 인간의 탄생 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탄생 성이 개인의 개성을 열어놓는 인간적 특성이고요. 우리가 단지 이런 개성 없이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것만 있다면, 모든 일은 계산만 잘하면 해결이 될 겁니다. 가치에 따른 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탄생 성으로 인해 인간의 복수성이 형성되고, 개성이라는 것이 형성되고, 그것 때문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것으로 정치의 장이 형성되기 때문에 그 속에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바로 위대함이 드러날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인간의 탄생 성과 복수성이 표현되고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부여되기를 바라는 것이 자유입니다.

정치가 요구되는 이유 - 자유

정치는 바로 자유 때문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정치적 자유를 바라는 인간의 모습은 그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꼭 필요한 요소인 거죠. 예를 들면 인간에게 물질적 풍요가 충분히 주어진다고 가정을 하고 그 물질적 풍요를 줄 테니 당신의 자유를 달라고 한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면, 이제 그와 같은 존재의 모습은 노예적인 사람이죠. 노예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물질적 풍요가 보장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노예가 행복할 수 없다면, 다시 말하면 노예가 결여하고 있는 자유라는 것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면 정치는 바로 그런 인간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라고 하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