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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교양, 정치, 철학, 악의 평범성

말과 생각의 개념과 구별

말과 생각의 개념과 구별

말과 생각의 개념과 구별
말과 생각의 개념과 구별

아이히만 재판 가운데 한 가지 흥미 있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그뤼버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인 목사, 그런데 조금 높은 직책인 감독 지위를 가지고 있는 분을 모셔서 그 현장에서 신문을 하게 됩니다. 이분은 아이히만과 협조적인 관계를 하면서 유대인들이 독일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상당히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이 그뤼버 감독은 훌륭한 일을 한 사람으로서 검찰 측의 증인으로 나와서 증언을 하게 됩니다. 독일인 개신교 목사인 이 그뤼버 감독은 아이히만 재판에서 유일하게 독일인으로서 증언을 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뤼버는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서 아이히만과 협상을 벌였고 또 기독교로 개종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에게 현재 이 사태의 위험성을 알리는 그런 역할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서 발언을 하는 가운데 아이히만의 독일인 변호사가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개신교 목사였는데, 이때 당신은 아이히만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목사로서 당신은 그의 감정에 호소하고 또 그에게 설교도 하고, 그래서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설득해 보려고 하는 시도를 했습니까?"라고 질문을 한 것이죠. 이 말은 마치 무엇과 같냐 하면, 지금 독일을 위해서 그야말로 나치 치하에서 강력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람에게 단지 일과 관련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바꾸려고 하는 목사로서의 노력을 당신은 해본 적이 있느냐고 질문을 던졌던 것이고, 아마 그 질문은 상당한 무게감으로 다가왔을 거라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때 그뤼버 감독은 "행동이 말보다 더 효과적이지 않습니까? 제가 말해봤자 쓸모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와 같은 대답을 듣고 한나 아렌트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과연 그뤼버 감독이 그때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 올바른 것인가? 그리고 금방 하고 있는 이 그뤼버 감독의 말속에 문제는 없는 것인가?' 무엇인가가 걸렸던 것 같습니다. 생각을 통해서 한나 아렌트는 그뤼버도 이 순간에 상투어를 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이 말보다 효과적이다', '말해봤자 쓸데없다'라고 하는 것. 바로 이 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하나의 생각 없이 내뱉는 상투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난번에 들여다보았던 것처럼 행위와 말의 관계에 있어서 사실 말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행위의 의미는 항상 말로 해명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조금 앞서 이야기해 보았던 것처럼 말에도 힘이 있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 자체가 행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이런 지적을 합니다. "그뤼버 감독은 목사 아니냐. 그러면 목사의 임무 중에 하나는 말을 하는 것이고, 말이 영향력을 미치는지 안 미치는지를 확인해 보는 것. 바로 그것이 목사의 임무가 아니었느냐. 그러니까 그는 자기가 말하는 그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말을 해봄으로써 그 말이 작용하는지 아닌지를 사실은 시도해 보는, 적어도 그것은 그가 했어야 할 일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라고 본질적인 것을 지적합니다.

말의 쓸모

이것이 현실적으로 과연 타당했는지 안 했는지는 차치하고도 바로 '말의 쓸모'라고 하는 점에 우리는 주목을 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좀 더 넓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으로 이끌어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과연 생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국 사회의 큰 어른이셨고 그리고 돌아가셨어도 계속 지성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함석헌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 가운데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나라가 산다."라고 하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여러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나라가 산다. ' 그 말은 우리 시민들이 생각을 하지 않을 때는 나라가 죽는다는 의미가 되겠죠. 소크라테스는 전에 소개했던 것처럼 자기 검토가 없는 삶, 다시 말하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초점은 개인에 맞춰져 있다면,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은 이 국가, 나라의 차원에도 맞춰져 있습니다. 이처럼 그야말로 생각 없이 살았을 때는 나라조차도 망하게 할 수 있는 이 생각이 무엇인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생각의 구별

먼저 '생각은 무엇과는 다르다'라는 방식으로 생각이 아닌 것과 구별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생각은 느낌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좋은 느낌, 나쁜 느낌, 불길한 느낌 등등 이런 것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예감, 직감 이런 것도 느낌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어떤 때는 상당히 맞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예감이나 느낌이 다가왔을 때 그 느낌에 충실하게 한번 들어가 보고 또 행동하는 것이 필요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왜 이런 느낌이 들까요? 아마도 이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평소의 경험이나 여러 가지 것들이 종합이 되어서 비록 명료하지는 않지만,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어떤 감각으로 다가오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내용은 불명료하다는 점, 구체화되지 않은 채로 막연한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에 있어서 생각과는 차별화되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순간에 어떤 느낌이 중요하다는 그런 느낌이 다가오고 그리고 이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이 느낌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따져보고 살펴볼 수 있어야 되겠죠. 그리고 그 느낌은 내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주위에 펼쳐져 있는 이 여러 가지 정황이 왜 나에게 이런 느낌을 주는지를 살펴보는 이 관계 속에서 생각은 드러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이 생각으로 전환이 될 때 내가 하려고 하던 행동을 중지할 수도 있고 또는 어떤 때는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냥 느낌은 남과 공유할 수가 없는 것이죠. '나는 이렇게 느끼고 있다. ' 그런데 그 느낌을 상대도 똑같이 느끼게 할 수는 없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 느낌의 내용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은 생각이라는 이 프로세스를 거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생각은 계산과 다릅니다. 계산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숫자를 다루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두뇌를 활용한 기술입니다. 간단한 사칙연산을 할 때는 아주 단순한 차원에서의 기능이 작용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두뇌가 성장하고 머리가 커짐에 따라서 이 계산능력도 뛰어나게 되고요. 그러면 아주 복잡한 형태의 연산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계산만 잘하는 것을 가지고는 우리는 '생각을 잘한다. 생각을 하는 것' 이거 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응용문제를 풀거나 또는 수학에 계산 능력이 적용이 되지만, 문제 자체가 현실적이고 의미 있는 문제를 다루는 것은 계산은 단지 부분으로만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히만의 경우는 생각은 빠진 채로 계산만 잘했던 그런 사람인 것이죠. 그래서 생각은 계산과도 다른 부분입니다. 또한 생각은 인지 작용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지라고 하는 것은 사물을 구별해서 식별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물의 식별능력이 단순한 부분적인 것에서 뿐만 아니라 좀 더 큰 틀에서 보는 것도 이러한 인지 작용으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현실은 시간에 따라서 자꾸 변화하는 유기적인 변화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지능력이 아주 뛰어나고 또 복잡하게 이루어지는 사람들은 여러 개의 공을 한꺼번에 저글링을 하는, 돌릴 수 있는 사람들처럼 여러 변화하는 상황을 빨리빨리 인지해서 대처할 수 있는 그런 능력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의 의미를 인간의 삶과 연관시켜서 살펴보지 않는 이상은 이런 인지 작용은 사유, 생각이라는 것과는 여전히 차별화가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 생각은 인식과도 다릅니다. 인식이라는 말은 영어 단어로 얘기를 하면, know, '안다'라는 단어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인식은 knowing입니다. 그리고 이것의 명사형인 knowledge는 '지식'을 말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타당한 내용의 어떤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식이라는 것은 과학적 지식을 얻는 정신 활동을 말하는 것이죠.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그리고 이미 확보된 어떤 지식의 종합 그리고 분석을 통해서 지식은 얻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과학적 발전이 나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과학과 생각은 여전히 차이가 납니다. 생각은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의미를 묻는 과정입니다. 이처럼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생각'이라고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생각은 이러이러한 것이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설명을 했는데요. 그러면 아니라고만 얘기하지 말고 '생각은 이런 것이다'라고 지칭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플라톤은 생각을 '나와 나 자신의 대화'라고 규정했습니다.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때때로 다이몬이라고 하는 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다이몬을 정말로 외부에서 신이 말을 하는 것으로 얘기하는 것은 너무 종교적인 해석이겠죠. 결국 자기와 자기 자신의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고, 그 자기와 자기 자신의 소리 없는 대화에서 나온 어떤 결과물이 바로 다이몬의 음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대화라고 하는 것은 항상 무엇에 관한 대화입니다. 자기와 자기가 대화한다고 했을 때 그냥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자기와 자기가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생각의 개념

생각, 다시 말해서 자기와 자기 자신의 대화가 이루어질 때 그것은 어떤 일이나 어떤 행위에 대한 것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가 했던 일에 대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물어보는 그런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따지고 계산하고 인식하고 지식을 얻으려는 아주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서 뭔가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돌아보는 가운데 조용히 떠오르는 어떤 것. 그러니까 뭔가 아주 적극적으로 노력해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침전할 때 드러나는 것, 나타나는 것. 이처럼 상당히 수동적인 성격을 갖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어를 보게 되면, '진리'라는 말을 알레테이아(aletheia)라는 말로 씁니다. aletheia라는 말은 'a'라고 그리스어의 '아니다'를 의미하는 부정 접두어와 'lethe'라고 하는 망각을 의미하는 단어가 겹쳤습니다. lethe라고 하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망각의 강입니다. 지상에서 이제 목숨을 다해서 저승으로 갈 때 사람들은 망각의 강을 지납니다. 그런데 그곳은 태양이 내리쬐고 목이 마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강물을 떠서 먹게 됩니다. 그 물을 많이 먹었던 사람은 현실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고 그리고 이 lethe의 강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의 일을 잊게 만드는, 다시 말하면 망각으로 들어가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aletheia라는 말은 바로 망각했던 것, 잊어버렸던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 나타나게 하는 것. 그래서 '드러난다. 나타난다. 은폐되어 있는 것이 비 은폐 상태로 나온다. '라고 하는 것이 '진리'의 의미입니다. 하이데거가 진리 또는 우리 생각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대단히 수동적이고 비 은폐적인 것이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