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민, 교양, 정치, 철학, 악의 평범성

악의 평범성 극복 방법 - 독단과 이해의 차이

악의 평범성 극복 방법 - 독단과 이해의 차이

악의 평범성 극복 방법 - 독단과 이해의 차이
악의 평범성 극복 방법 - 독단과 이해의 차이

'악의 평범성에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그리고 나아가서 현실이 악할 때 사람은 그 속에서 정의롭게 살기는 참 어렵겠죠? 때때로 자기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아이히만처럼 체제에 복종해서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기능만을 담당하다가는 역사 속의 죄인으로 전락할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정의로운 행동을 하지는 않더라도 나쁜 행동에 빠지지 않는 그런 자각이 필요한데, 과연 이러한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것이 우리 속에서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그렇게 이루어지는가? 또 지식인들 가운데서는 불의한 정권에 아무 생각 없이 협조하면서 그 협조로부터 나오는 어떤 결실을 취하는 그런 사람도 있고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충돌하기 때문에 차마 그들과 협조하지 못하는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두 경우가 어떻게 해서 달라질까. 과연 똑같은 지식인이라도 그 지식의 틀 속에 어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런 태도의 차이를 낳게 되는지 바로 그 부분을 조금 치밀하게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지금 강의가 조금 길 수 있으니 참고 집중하시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아이히만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그 경우를 조금 뒤집어서 생각을 해봅시다. 아이히만은 '생각 없음'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 없음'은 그의 상투어 사용에서 포착이 됩니다. 상투어란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일까요? 상투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상투어는 아닙니다.

진부함

상투어는 처음에는 신선한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현상을 다루기 위해서 신선하게 만들어진 그 말이 이제 시간이 지나면 현상은 변하잖아요. 그러면 말도 변해야 되는데, 말은 변하지 않고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는데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썼던 그 말이 계속 사용되는 그런 경우입니다. 그래서 이 상투어라는 말은 변화되는 상황에 따라서 생각이 새롭게 뭔가 말이 일구어내야 될 텐데, 새로운 생각을 일구어내지 못하도록 머릿속에 이미 형성된 어떤 생각에만 맞춰서 현실에 응대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현실이 있고 생각이 있고, 그 사이에 언어가 현실의 새로운 것을 반영시켜줘야 되는데, 과거에 잘 통했던 어떤 말이 상투어로 고착이 되면 이 상투어 때문에 현실의 변화하는 이 생생한 힘이 우리의 머릿속으로 들어올 수 없게 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에서 나오는 말, 행동 그리고 상투어들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진부함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변하지 않으니 진부해지는 것입니다. '악의 평범성' 이 말이 '악의 진부성'이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을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투어들이 내가 사용하고 있는 일상적인 언어습관 속에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가 우리가 얼마나 생각을 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는 것이고요. 말의 힘이 또한 얼마나 강한가도 보여주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은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또 그것이 내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힘을 갖습니다. 그런데 말이 나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내가 가질 수 있죠. 그러한 태도를 가리켜서 우리는 독단이라고 부릅니다. 독단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서 말을 통해서 다가오는 현실의 영향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독단

여러분, 독단에 빠지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항상 자기 틀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면 그 틀에서만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나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독단에 빠진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은 항상 자기 생각만을 반복적으로 불러내고 반복해서 말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있어서 말은 자기의 독단을 관철시키는 데에 대해서만 사용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해서 갖는 태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독단적 생각을 이 세상 속에서 그대로 적용시키고, 그래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 투쟁하는 도구로서만 활용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그의 독단이 나와서 세상을 공격하는 도구로만 쓰이는 것이지 세상으로부터 영향력이 그 사람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서 생각이 변화되는 것으로는 절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의 기능, 말의 힘이 그에게는 작동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그 독단에 빠진 사람에게 있어서 말은 항상 공격용 무기가 되어 버립니다. 대화의 장치가 아닌 것입니다. 그럼 이런 독단에 빠져 있는 것과 정반대의 태도는 무엇일까요? 독단에 반대되는 태도를 가리켜서 우리는 '이해의 태도'라는 말을 씁니다.

이해

이해란 무엇일까요? 지금 쓰고 있는 이 이해라고 하는 말은 일종의 전문용어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이해한다'라는 말과 연결은 되지만, 반드시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드리는 이 '이해', 나아가서 '이해의 태도'라는 말. 뭔가 좀 새로운 단어가 있으면 더 쉬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영어 단어로 얘기하면 understanding, 독일어로 얘기하면 verstehen이라고 하는 이 단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고, 실제로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이해'라는 말 속에는 함께 그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그대로 원어를 살려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해라는 것이 우선 왜 필요한지 한나 아렌트가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겠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 인간들, 여러분과 저 개개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에 갑자기 나타나는 거잖아요. 그러면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물론 아직 지성도 성숙되지 않고 아주 어린 아기로 태어났으니까 지금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런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어울리지 않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쨌든 본질적으로 이방인으로 인간 세계 속에 우리는 등장합니다. 이처럼 새로운 존재인 우리는 이 세계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 우리 자신을 먼저 적응시키게 친숙해지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몸으로 존재하는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낯선 세계 속에서 이 세계를 알고 우선 받아들이는 그런 장치, 이것이 우리가 갖게 되는 이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 세계가 아주 살기 좋은 세계, 정의로운 세계일 수도 있고 또 나치 독일과 같이 또는 공산주의 체제와 같이 아주 살기 어렵고 비인간적인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런 세계라 하더라도 우리는 일단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알고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풀면, '현실과 친하게 되기', 현실을 감수하고 받아들이고 화해하기' 또 '현실과 편하게 되는 것' 이런 등등으로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문제를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독재나 아주 사악한 세계의 현상이 벌어졌을 때 이 세계와 어울리거나 화해한다는 말은 바로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거는 옳다. 있는 그대로 그냥 인정해라. 있는 그대로 다 수용해라. '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누구와 대화하다가 "저 사람 이해하지 못하겠어. " 하고 충돌을 하다가 "그래, 내가 이제는 이해했다. "라는 말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의미가 있죠. 그래서 보통 '화해' 또는 '이해'라는 말에는 '용서'라는 모티브를 포함해서 우리는 많이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해는 바로 그와 같은 용서를 포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아도 여전히 우리는 이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험한 일, 견딜 수 없는 일 또는 전체주의 국가와 같이 험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이 세계를 참고 견디면서 직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며 직시하지 않는 것과 반대되는 것은 뭘까요? '나 이런 세계 싫어. 쳐다보지 않을 거야. ' 하고 외면해버리는 것입니다. 외면을 해버리게 되면 이 세계를 알 수 없게 되고, 이 세계에 대해서 내가 올바른 태도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이 세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이 세계를 바꿀 수도 있는데, 바꾸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는 것이고, 알기 위해서는 들여다봐야 되는데 이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고 견디면서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 그게 왜 그렇게 갔는지를 체계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당연하다'라는 인정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흘러갔던 경과를 그대로 짚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는 일종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고요. 이것은 지식과는 다릅니다. 지식은 현실에 대한 명확한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세계는 이렇게, 이렇게 구성이 되고,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명확하게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해는 이처럼 문장으로 전달되는 특정한 내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 참된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계를 바꿔가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아니죠. 세계를 바꾸는 것은 지식을 많이 갖는다고 해서 일어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지식이 이 세계의 나쁜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전체주의를 보면, 이 전체주의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게 되면 이 전체주의의 약점을 보완해서 전체주의 체제가 더 잘 돌아갈 수 있도록 기여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하게 되면 이 전체주의 상황이라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분노하게 되죠.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협조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를 가진 사람은 바로 이처럼 전체주의의 실상을 알게 되고, 그 전체주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면 그 지식을 가지고 전체주의와 싸우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이해의 태도로 무장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서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지식과 이해가 어떤 식으로 서로 연결이 되는지를 조금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이해를 우선 두 가지로 구별해볼 수 있습니다.

예비적 이해와 참된 이해의 개념

예비적인 이해와 제대로 된 참된 이해입니다. 예비적인 이해라는 것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말합니다. 지식과 무관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과 어울려서 살 것인지 아니면 이 현실을 바꾸어 살 것인지에 대한 판단과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고,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이 세계 속에 적용시킴으로써, 생각을 함으로써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예비적인 이해를 어떻게 갖느냐? 그리고 이 예비적인 이해를 가지고 세상에 대해서 정말 바꾸려고 하는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질 것이냐 아니면 그냥 나만을 위해서 이해관계에 얽혀서 살 것이냐 라고 하는 그런 태도를 갖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지식 추구는 방향이 달라집니다. 예비적인 이해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사람은 지식은 맹목적인 것입니다. '맹목'이라는 말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방향성 없이 그냥 좌충우돌 도구적으로 활용될 뿐입니다. 예비적인 이해에 따라서 형성된 지식은 현실에 초점이 맞춰져서 내용 있는 지식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여러 단편적인 지식을 수집해서 결국은 하나의 체계적인 지식을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는 경우가 그야말로 학자적인 차원 또는 아주 구체적인 현실을 바꿀 수 있을 만큼의 무게감 있는 지식을 형성하게 되는 차원이겠죠. 그런데 예비적인 이해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은 지식이 방향을 갖게 되고, 그 지식 자체가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예비적인 이해를 가진 사람은 이런 체계적인 지식을 가져가는 과정 속에서 예비적으로 가졌던 이해 자체가 변화됩니다. 그래서 현실을 좀 더 자세히 지식을 통해서 알게 됨으로써 예비적으로 가졌던 이해 자체가 아주 성숙한 모습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 체계적인 지식과 더불어서 제대로 된 참된 이해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비적인 이해는 정확한 지식의 체계를 토대로 해서 참된 이해로 변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이해는 따라서 단순한 지식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체계적 지식을 갖춘 이해, 아마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지식인의 모습일 테고요. 현실을 살아가는 시민들, 현대인들도 적어도 어느 정도의 이러한 참된 이해를 갖추는 것이 필요한 부분일 겁니다. 이처럼 이해를 통해서 의미 있는 지식을 갖게 된 사람은 현실의 역동성 속에서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과연 우리가 독단에 빠져 있는지 아니면 참된 이해를 갖고 있는지, 이것을 우리가 반성적으로 한번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나아가서 우리가 평범한 악에 빠져 있는지, 우리가 제대로 생각하는 과정 속에 있는지를 알아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한나 아렌트의 충고

한나 아렌트는 바로 이와 연관해서 우리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합니다. 우리가 과연 제대로 된 의미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참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겸손하게 대중적인 언어, 일반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다시 말하면, 남의 말에 얼마나 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내가 남의 말에 얼마나 잘 귀를 기울이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남의 말 또는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이 많은 말에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청할 때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현실의 참된 모습을 만나게 되고, 그 모습을 우리의 생각 안으로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독단에 사로잡혀 있으면 현실을 보아도 현실의 질곡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실의 참된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다른 생각을 요구하는데, 다른 생각을 갖게 되는 모티브는 바로 말을 통해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 속에 나의 언어,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나의 언어와 말을 통해서 전달이 되는 남의 언어. 그런데 이 남의 언어는 아주 학문적이고 어려운 과학적인 언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 형성되는 바로 그러한 언어, 그러니까 평범한 이웃, 아주 편하게 우리 주위에 있는 가족들의 언어가 나에게 얼마나 다가오는지가 중요한데요. 그렇게 다가오는 언어가 나의 언어와 함께 섞여서 내 생각이 새로워지는 것. 바로 이것이 사유의 과정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고, 내가 이해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게 되는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듣고 내 생각을 그 말에 맞춰서 말이 섞이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평범한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