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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교양, 정치, 철학, 악의 평범성

악의 평범성과 개념, 우리의 책임

악의 평범성과 개념, 우리의 책임

악의 평범성과 개념, 우리의 책임
악의 평범성과 개념, 우리의 책임

아이히만이 보여준 생각의 결여. 그래서 너무나 평범한 모습. 그러나 그 평범한 것으로부터 엄청난 악이 나온 것. 이 결과를 놓고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단어를 붙여줍니다. 그런데 악(惡)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뭘까요? 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철학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많은 사람이 고민을 했었습니다. 악이라는 문제를 처음 철학적으로 거론했던 사람은 신학자라고 얘기할 수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영어 이름으로는 성 어거스틴이라고 부릅니다. 이분은 약 4세기 정도 또 5세기 시점에서 활동했던 사람이고요. 교부 시대 최고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이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라는 종교를 믿었다가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마니교에서 가지고 있었던 선과 악의 개념은 지금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선악의 개념과 무척 비슷합니다. 이 세계는 두 개의 신이 지배하고 있다. 신 하나는 선한 신, 다른 신은 악한 신. 그런데 선한 신과 악한 신은 서로 힘이 비슷한 거예요. 그래서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는데 어떤 때는 선한 신의 힘이 좀 세지고, 어떤 때는 악한 신의 힘이 더 세지는 이런 시소게임 같은 걸 합니다. 그런데 선한 신의 힘이 세질 때는 세상에는 평화가 오고, 풍요롭고 풍년이 듭니다. 악한 신이 힘이 세지면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일어나고 홍수가 일어나는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다. 과연 실제로 이 세상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가 마니교를 그대로 믿느냐 안 믿느냐를 묻는 것은 아니고요. 마니교에서 표상하는 것처럼 선과 악이 동일한 힘을 가지고 서로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만화를 보거나 또는 어떤 이야기를 보게 되면, 어떤 아이가 '이걸 훔칠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에서 머릿속에 천사가 나타나서 "하면 안 돼" 하고 얘기를 하고, 악마가 나타나서 "그거 얼마나 신나겠니? 훔쳐"라고 이 악마와 천사가 우리에게 계속 얘기하는 것처럼 이렇게 그림을 그릴 때가 있습니다. 마치 그것과 같은 모습인 거죠. 아우구스티누스도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타당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자기가 선과 악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면서 잘 해결되지 않았던 그 문제를 다시 깊이 생각을 해보니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악이라고 하는 것 또 선과의 관계는 마치 빛과 어두움의 관계처럼 해석하면 아주 잘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빛이 있고 어두움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빛과 어두움은 서로 강력한 힘, 다시 말하면 빛의 힘이 있고 어두움의 힘이 있고 이 빛의 세력이 강할 때는 어두움이 물러갔다가 어두움의 세력이 강해지면 빛이 물러가는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실제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는 방의 커튼을 다 닫아놓고 불을 하나도 켜지 않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여기에는 어두움만이 존재하겠죠. 그런데 우리가 불을 딱 켜는 순간 에너지가 들어오고 등을 통해서 환한 불이 쏟아져 나올 때 자연스럽게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은 그림자로 남을 뿐이죠. 그 상태에서 다시 어두움이 찾아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 빛이 환하게 있는 데서 어두움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바로 이 환한 빛이 가려지고 어두움으로 충만하게 되나요? 그런 일은 없죠. 왜냐하면, 어두움이라는 것은 빛이 없을 때 생기는 것이지 빛을 이길 만큼 어두움 자체가 실체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빛은 실체고 빛은 존재인데, 어두움은 그 본성이 실체나 존재가 아니라 결여, 다시 말하면 빛이 없는 것, 빛의 결여라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자들의 악에 대한 생각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했던 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거기에서 나올 수 있고 그 자체가 힘을 발휘하는 어떤 실체적이고 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이 결여된 것일 뿐이죠. 선은 존재고 악은 결여인 것입니다. 그것은 존재가 아닙니다. 마치 빛은 존재고 어두움은 존재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에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신이 만든 것이고, 선한 신이 만든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럼 악은 무엇이냐? 악은 비존재입니다. 존재가 없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 정말 사악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마치 악마에 의해서 조정을 받는 것처럼 악한 일만 골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된 걸까요? 모든 인간에게는 의지가 주어져 있는데, 바로 그 의지가 왜곡되게 작용을 한 것이고, 왜곡되게 작용한 그 의지가 습관적인 방법을 통해서 강화가 되어서 그 사람의 의지가 비뚤어진 채 활동이 되고 작용하기 때문에 바로 사악함이라는 요소가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악은 악마가 부여한 것이 아니고 의지를 가진 인간이 스스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악행을 행한 자는 그 악행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악이 단지 선의 결여일 뿐인가? 또는 왜곡된 의지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서 굳어져 사악한 것이 나오는 것일까. 뒤에 임마누엘 칸트라는 독일의 철학자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무언가 본성 속에 악을 향한 성향, 악을 행하려는 경향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칸트는 인간에게 있어서 악을 향한 성향은 어떻게 보면 보편적인 본성이고 또 타고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에게 악은 근본악이다. "라는 표현을 써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칸트의 도덕 철학을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인간 행동의 경향성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쪽으로 나가게 되기 때문에 모든 경향성과 반대되는 그것을 거부하고 오직 이성에 따라서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고 실천하는 것만이 소중하다는 철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칸트로부터도 많이 배우고 아우구스티누스도 깊이 연구했던 이 한나 아렌트가 악에 대해서 생각을 가졌던 것은 이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먼저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하면서, 물론 한나 아렌트가 그런 죽음의 수용소로 들어갔던 것은 아닙니다만, 한나 아렌트가 독일로부터 도망을 쳐서 프랑스에 머물러 있는 동안 수용소에 들어갔죠. 그래서 그 수용소의 경험을 잠시 하고, 남아있었던 사람은 전부 아우슈비츠로 갔지만 거기에서 위조 출입권을 만들어서 탈출한 덕분에 다행히 살아남았는데,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독일에서 그리고 독일 인근 지역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가를 알게 되고 난 다음에 한나 아렌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죠. 그래서 이런 경악을 금치 못할 일들에 대해서 한나 아렌트는 "절대악이다. 절대악이 벌어졌다. " 또 total evil, 그러니까 전면적인 악, 전체적인 악, 총체적인 악, 절대 악 이런 것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나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표현을 하게 됩니다. 1960년에 벌어졌던 예루살렘 재판에 참관했을 때 아이히만을 통해서 그 절대악의 모습을 볼 것을 기대했지만,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아렌트가 보았던 아이히만의 모습은 달랐죠. 그래서 아렌트는 바로 이 악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작용할 때는 아주 평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쉽게 악의 문제를 사회구조의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는 때때로 "내가 악마에 씌웠어. "라는 식으로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사회로 그 책임을 넘기는 것 또는 악마의 존재를 얘기하는 것은 악을 행한 인간의 능력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분석을 하지 않는 게으른 태도일 수 있습니다. 단지 사회 제도의 차원에서 악의 문제를 보거나 또는 뭔가 악을 행한 여러 사람들의 행위의 공통분모로 악마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얘기를 하는 순간 바로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물어야 할 마땅한 책임의 소재 파악, 책임 묻기를 회피하는 시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악의 평범성과 우리의 책임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유대인 학살 사건과 같은 이런 일들을 통해서 과연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 모습은 그런 일을 범했던 나치스가, 나치에 관여했던 그 수많은 사람이, 학살에 관여했던 그 수많은 사람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 바로 이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끔찍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몽과 같은 현실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들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여지없이 다 해버렸다는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넘어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해버렸다는 것. 그래서 불가능한 일을 했다는 좋은 의미에서 모든 것이 다 가능했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해서는 안 될 일까지 다 해버렸다는 것,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들이 그것을 했다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경험했던 악몽과 같은 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책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논리적인 구성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