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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교양, 정치, 철학, 악의 평범성

인간의 정신 활동과 언어의 중요성

인간의 정신 활동과 언어의 중요성

인간의 정신 활동과 언어의 중요성
인간의 정신 활동과 언어의 중요성

악의 평범성이라고 하는 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실마리가 있을지에 주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악의 평범성, 영어로는 banality of evil이라는 말인데요. 이 말의 뜻은 '악은 생각하지 않는 것, 사유가 없는 것' 한마디로 무사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잠시 이 영어 단어 banality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banality라는 말은 사실 우리말에 딱 적절한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진부성, 범속성 등으로 번역을 할 수 있는데, 저는 이 여러 가지의 의미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우리말 어감에 가장 그래도 적절하게 부합하는 '평범성'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낫겠다 해서 이 번역어를 선택했고요. 다행히 이 번역어가 널리 받아들여져서 한국 사회에서는 이 표현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은 그 내용에 있어서 보면 악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고 단지 극단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이지 않다는 말은 한자어로 근본(根本)이라는 말, 다시 말하면 뿌리가 있고 땅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어떤 실체와 내용이 있는 그런 차원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악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의 작용, 실천, practice 속에서 극단적인 상황까지 갈 수 있는 그런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면 악을 놓고 악이 무엇인가, 그것의 근본이 무엇인가, 내용이 무엇인가에 깊이 고민을 해보아야 하는데, 사실 악에 대해서는 깊은 생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냐 하면, 악은 없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다시 말하면,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은 무(無)입니다. 없습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 무(無)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을 해보게 되면 아무것도 없으니 사실상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악이 뿌리는 없지만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부분은 있는 것이고요. 그 작용하는 부분이 어떻게 작용하는 그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주목을 해보았을 때 발견하게 되는 것이 '생각이 결여되었다. 모든 인간은 생각을 하면서 살게 되는데, 생각이 빠진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또는 어떤 방식으로 의지가 왜곡되어서 작용해서 악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라는 말을 했는데요. 그러면 우리가 이 평범한 악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생각을 회복하는 것이 좋고요. 그리고 이 생각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그러면 그것은 어디를 주목할 때 우리가 그 부분의 문제점을 포착할 수 있을까요? 바로 말에 주목을 해야 됩니다.

언어로 작동하는 생각

우리의 생각은 언어로 작동이 되고 언어로 표현이 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악의 평범성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한나 아렌트는 '말과 생각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아이히만에게 나타나는 어떤 이상한 언어 습관을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포착했던 것인데요. 아이히만은 과거에 자신의 일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cliche라고 하는 상투어들 그리고 관청에서 주로 많이 쓰는 굳어진 관용어 같은 어법 또 선전 선동을 위해서 사용하는 선전 문구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머릿속에서 나와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데 주목을 합니다. 우리는 이제 이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독일어로 표현한 그 내용을 한국어를 쓰는 우리들이 이러한 특성을 그 언어로부터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어려서부터 독일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고요. 그래서 아이히만이 쓰고 독일 사람들이 쓰는 그 언어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아이히만의 입에서 나오는, 예를 들어서 "함께 노력하고", "가슴을 털어놓고", "모든 슬픔과 비애", "양쪽 모두에게 공정한", "너무나 변한 시대",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등등 이런 표현들은 거의 일상적으로, 상투어적으로 생각 없이 그냥 주워 담아서 쓸 수 있는 그런 표현들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재판관들이 어떤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 "아이히만 씨, 당신이 했던 그 말을 좀 다시 설명해 주세요. "라고 설명을 요구할 때가 있었습니다. 재판장에 앉아있던 이 재판관들은 모두 독일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고 활동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들은 모두 독일어를 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용어나 클리셰 같은 경우는 그것이 사용되는 본래적인 맥락을 잘 모르면, 듣는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판사가 "그 표현이 어떤 의미냐" 하고 다시 물었을 때 보통 같으면 그렇게 사용한 말을 다른 언어로 바꾸어서 설명을 하게 되겠죠. 그러나 아이히만은 "미안하지만 제가 쓰고 있는 말은 관청 용어고요. 이것은 저의 언어입니다. " 그러고는 자기의 언어가 되어버린 그 관청 용어에 대해서 다른 용어로 바꾸어서 설명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아이히만은 상투어가 아니고는 단 한 구절도 그 내용이 있는 제대로 된 말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우리들의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일상 언어로 이러한 말들을 바꾸어 표현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나치들이 사용한 언어 표현

이처럼 상투어들, 관청 용어들을 한마디도 또 단어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계속 그 입에서 반복되고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아렌트는 주목을 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말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죠. 말하는 데에서 왜 이런 무능함이 나타날까? 그것은 그 근본 뿌리에 있는 사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다시 말하면, 사유의 무능 성, 무사유라는 것이 말의 무능 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이 범위를 확장해서 아이히만의 경우뿐만 아니라 독일의 나치스들이 활용했던 언어 규칙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치스들이 사용했던 언어 표현을 제가 몇 가지 소개해 보겠습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해결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final solution, 즉 '최종 해결책'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였을 것 같습니까? 아마 지난주 강의를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은 "그거? 유대인을 다 멸절시키는 것, 모두 죽이는 것. 그 의미 아니었나?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거니까. " 제가 지난주에 소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을 모두 죽이기'라는 말과 '최종 해결책' 이 두 개가 주는 어감은 굉장히 다르죠. '특별 취급' 누군가를 특별히 취급한다면 대단히 좋은 일 같지 않습니까? 이것은 바로 유대인들을 학살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한 대우를 한다는 의미죠. 완전히 다른 느낌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죠. 여러분, '안락사'가 무슨 뜻입니까? 요즘 한국 사회에서 안락사도 많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안락사'라는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이 남았을 때 불필요한 수명 연장을 하지 않고 편하게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다시 말하면 안락한 죽음을 맞게 하는 그런 절차.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찬반 논쟁이 현재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뜻으로 나치스가 '안락사'를 말했던 것은 아닙니다. 말의 뜻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 '안락사'라는 말을 가지고 무엇을 지칭했느냐? 이것이 다른 것이죠. 나치들의 이 말은 장애인들을 없애는 것을 얘기합니다. 장애인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위대한 게르만 종족 속에, 아리아인의 이 혈통에 이런 장애인이 나타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장애인들은 사회에서 그야말로 장애가 되니까 다 없애버려야 된다. '라는 그런 프로젝트를 하게 되고, 이러한 프로젝트를 '안락사'라는 표현으로 쓰게 된 것입니다. 이 단어는 그때 그들도 사용했고 지금 오늘날 다른 맥락에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 어감 때문에 사실은 미국이나 한국에서 안락사 문제가 다루어지는 것이 현재 독일에서 안락사 문제가 다뤄지는 것과는 굉장히 층위나 논법이나 문제의식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없는 기억이 독일 사람들에게는 있기 때문이죠. 그들은 과거 이 나치 치하에서 안락사라는 말을 장애인을 없애는 정책에 썼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우회적인 표현법을 나치스는 많이 사용을 했습니다. 이것을 그들은 언어 규칙이라고 했습니다. 이 언어 규칙은 일반인들은 반드시 사용해야 되는, 따라야 하는 그런 규칙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히틀러나 또는 이 정권에 있어서 최고 책임자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수행하는 아주 핵심적인 멤버들은 굳이 이런 언어 규칙에 메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나치스들은 '비밀을 가진 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런 언어로부터 자유로웠지만, 다른 일반인들 또 그 일을 수행하는 낮은 단계에 있었던 사람들은 반드시 이런 말들을 쓰게 했습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여기에는 반드시 그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치들의 우회적인 표현법 효과

첫째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실제로 유대인들을 죽이거나 또는 아주 악독한 일을 할 때 그 일을 바로 그 내용과 관련한 깊은 의식을 가지고서는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 일을 수행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적어도 의식만큼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기능을 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문제를 처리하는 가운데 협조 체제를 이루어가고 뭔가 제정신을 유지하는 가운데 질서도 지켜가면서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언어 규칙을 사용하는 것이고, 이런 현실과 동떨어진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짜 추악하고 사악한 일들이 주는 감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그런 일을 언어 규칙이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언어 규칙을 사용했던 것 그리고 다시 아이히만의 케이스로 돌아오면 클리셰나 관청 용어를 씀으로써 아이히만이나 나치스에게 주는 효과는 무엇이냐 하면, 현실에서, 즉 실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들의 언어를 통해서 그들의 사고에 영향을 주는 것을 차단하게 하는 그러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악의 평범성의 문제. 이것은 '사유가 없음, 생각이 없음'의 문제라고 했는데, 바로 그 중심 속에 말이 개입되어 있고,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바로 이 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